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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의 근원(根源)인 불신풍조(不信風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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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의 근원(根源)인 불신풍조(不信風潮)
  • 이 량 기자
  • 승인 2018.03.05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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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서병규 본사주필.

예나 지금이나 항간(巷間)에 불신풍조가 없었던 때는 없다 해도 무리한 말이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에서도 불신풍조가 각 부문에 만연(漫然)하고 있다는 불만이 표출되고 있다. 그래서 사회기반(社會基盤)의 뿌리부터 흔들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그 원인을 따지자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어떤 목적, 목표달성에 집착(執着)한 나머지 과정과 절차, 수순을 무시하고 승패(勝敗)의 논리가 정사(正邪)의 윤리를 압도해 극단적인 자기중심의 행동양식으로 흐르게 돼 서로 믿고 의지하는 신뢰관계가 허물어져 불신이 만연하게 되는 것이다.
                 
선진대열에 들어서는 우리는 신뢰사회를 구축해야
 
가난에 시달렸던 지난날의 우리는 잘살아 보는 게 지상의 소망이었다. 그래서 잘살기 위해서는 어떤 일,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으며 그 이면에 잠재(潛在)되어 들어나지 않고 속에 잠겨있거나 숨어 있는 깊은 뜻 같은 것들을 살펴볼 여유마저 없었던 게 사실이다. 우선 살고 나서야 나머지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는 긴박한 생존의 논리가 삶을 이끌어가는 지주(支柱)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논리, 상황을 벗어나 생활을 하되 올바르게 살아야 되고, 나의 생존만이 아니라 모두의 삶이 따뜻하고 아름답게 엮어져야 한다는 방향으로 진전되어야 하겠다. 과연 그렇다면 믿음직한 신뢰사회는 어떻게 이룩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남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이루되 모두가 힘 합쳐야 할 일임이 분명하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나 어떤 정당의 결의(決議)에 의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신뢰사회를 이루는 일은 개인의 의식이 크게 바뀌어야 하고 조직의 논리, 단체의 생리(生理), 집단의 역량이 점진적으로 바뀌어야하기 때문에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개인이나 집단, 조직이나 단체 기관이 그 말의 속뜻과 겉 뜻이 같게 표현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도 손해 없이 이익이 된다는 경험이 쌓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뢰(信賴)가 정착되어야 한다.
그리고 결과가 아무리 훌륭하고 멋지다 해도 그것을 이룬 과정과 절차가 올바르지 못하면 결코 인정받을 수 없는 분위기가 보편적으로 정립(正立)되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상식(常識)이 깨지지 않는다는 데 대한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서로 상식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합의의 근거 위에 성립이 되는 것이다.
상식이 빈번히 깨지고 오히려 영광과 혜택의 지름길이 되는 사례가 없어야 한다. 선생님, 부모님들이 믿음직스럽게 가르칠 수 있고 그대로 행동하면 긍정적 보상이 뒤따른다는 경험이 축적(蓄積)되어야 한다.
믿음직한 사회의 건설은 우리 세대의 지상과제라 할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우리의 다음 세대에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유산을 물려주게 된다. 신뢰사회를 건설하는 일은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쉬운 일로 여겨지지만 너무 자주, 너무 어이없게 상식이 깨지는 일들이 생겨 이제는 어떻게 하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는 바로 잡아 나가야 하겠다.
                   
믿음을 잃으면 시민, 국민의 지탄(指彈)을 받는다.      
          
 
프랑스의 철인(哲人) <라 로스호크>는 “사람이 상대를 믿지 않으면 상대에게 속아도 속은 것이 정당하게 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서로 믿음으로써 믿음을 저버리는 일이 정당하게 되지 않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이 폐기되면, 인간사회는 마침내 와해(瓦解)되고 만다는 교훈을 통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뢰사회 구축을 위해서는 사회지도층이 먼저 상식이 통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사회에 큰 영향을 주는 분야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신뢰를 잃으면 주민, 국민의 지탄(指彈)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보편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선진국 대열에 안착(安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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