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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일 107주년를 계기로 국난에 미리 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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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일 107주년를 계기로 국난에 미리 대비하자
  • 중앙매일
  • 승인 2017.09.01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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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경술국치일은 일제가 1910년(경술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공포해 대한제국 통치권을 빼앗은 치욕스러운 날이다. 일제가 강제로 한일합방을 하여 국권을 상실하자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환-홍명희의 부친인 홍범식 등 우국지사들은 나라 잃은 울분을 참지 못해 자결하였고, 홍범도-오동진-김구-이회영, 안중근, 김원봉, 윤봉길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일제에 대항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 국민들은 먹고 살기에 급급한 나머지 역사의식이 부족해 경술국치일을 까맣게 잊고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 같다.
민족사학자이자 항일독립운동가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40여 년간 재야 민족사학자로서 충청지방을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조사 연구해 온 나는 경술국치 107주년를 맞이하여 지난 주 토요일 오후 의병이자 항일독립운동가인 한훈 선생 손자를 찾아뵙고 인터뷰를 하고 돌아왔다.
한훈(韓焄, 1890-1950) 선생은 1890년 2월 27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君) 사양면(斜陽面) 흥산리(興山里)에서 한성교(韓省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당숙인 호교(互敎)에게 입양되었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본명은 우석(禹錫), 자(字)는 성초(聖初), 호(號)는 송촌(松村), 그리고 만우(萬宇)-동열(東烈)-조주사(曹主事)-조선달(曹先達)이라는 가명(假名)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5척 단구(短軀)의 야윈 몸에 넓은 양미간과 자그마한 눈의 소유자로 대담하고 침착한 성격을 지닌 투사였다.
그는 을사늑약 직후인 1906년 홍주에서 민종식이 항일의병을 일으켰을 때 친형 한태석과 함께 열여섯 살에 홍주의병에 가담했다. 당시 선생은 홍주의병 가운데 이용규(李容珪) 휘하에 소속되어 부여, 노성, 연산, 공주 등지에서 활동했다. 한훈 선생이 의병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는 홍주의병에 가담해 청양 정산의 칠갑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외숙(外叔)의 유언 때문이었다. 홍주의병이 실패한 후 선생은 신도안에서 은거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오적을 처단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나철, 오기호 등도 이때 을사오적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는데, 여기에 선생은 지방결사대로 참여하려고 했으나 나철 등이 일경에게 체포됨으로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한훈 선생은 악질 직산 군수를 사살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1911년 귀국해 임병찬과 독립의군부를 조직,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3년에는 풍기에서 채기중·유장렬·김상옥 등과 함께 비밀항일결사 광복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5년에 박상진·우재룡 등과 합류해 광복단을 광복회로 개편, 강화해서 군대식 조직으로 편성하였다. 그 후 항일전을 전개하고 친일파 숙청활동을 하던 중 조직이 발각되자 재차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해로 가서 정부요인과 협의한 뒤 권총·폭탄 등 무기를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였다. 1920년 국내에서 결성된 비밀항일결사인 암살단과 합류하였다. 김상옥·김동순 등과 함께 당시 미국 국회의원단이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계기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 등 일본인 고관들을 암살하고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해 우리 민족의 독립열의를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계획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22일 김상옥 열사에게 무기를 전달하기 위해 가던 도중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8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 의병에 가입해 부호 및 지방의 면장 등을 납치하거나 살해한 사실까지 탄로나 형이 가형되어 19년 6개월간의 복역생활을 하다가 출옥하였다. 오랜 옥고를 치르며 건강을 잃은 그는 일제 강점기 동안 별다른 활동을 못하고 지내다가, 광복 후 상경하여 광복단 재건을 꾀하면서 반탁 운동 등 우익 운동에 앞장섰다. 한국 전쟁 중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논산에서 조선인민군이 우익 인사들을 대거 처형할 때 피살되었다. 1968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2002년 2월에는 국가보훈처 주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한훈 선생의 손자인 한상국(70세) 새람감리교회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한훈 선생은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과 의형제를 맺고, 독립운동가 탄압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를 폭파한 김상옥 열사를 사위로 삼아 서로 도와가며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해 한국의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빛나는 성과를 많이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한훈 선생 후손인 장남 한주동씨는 택시기사를 하며 궁핍하게 살고 있고, 차남 한민웅씨는 실업자로 비참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장녀 한염신씨는 주부로 외판원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고, 차녀 한영실씨는 유일하게 박사학위를 취득해 잘 살고 있으며, 막내 딸 한영옥씨는 가정주부로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손자인 한상국 목사는 찾아오는 신자가 없어 지금 대전 중구청 근처에서 화랑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금 경제 불황으로 매기가 거의 사라져 생계유지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요양호보호사인 부인이 사회복지기관에 취업해 가정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고 한다.
반면에 민족반역자인 친일파 후손들은 대부분 학력이 높아 누구나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을 잡아 부와 권력과 명예를 마음껏 누리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삼대가 흥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8.15광복절 경축사에서 “해방 이후에 헌정을 유린하고 국정을 농단해온 친일 독재 적폐세력을 청산하고 독립운동가 가족은 3대까지 국가가 생계를 책임지겠다.”고 공헌하여 항일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지금 기대에 부풀어 있다. 그리고 청주한씨종친회에서는 조만간 한훈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홍보하는 단행본을 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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