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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문단 수필 - 무두리 계곡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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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문단 수필 - 무두리 계곡을 찾아
  • 중앙매일
  • 승인 2020.10.0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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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환.
오영환.

▶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 (전) 충북 제천교육지원청 교육과장.
▶ (전) 청주봉정초등학교 교장
▶ 효동 문학상, 제5회 충북대학교 수필문학상
▶ 푸른솔 문학 신인상 (수필가 등단)
▶ 푸른솔 문인협회
▶ 제19회 산림문화작품 상 (당선)
▶ 제7회 청향 문학상 (특별상)
▶ 제15회 우리문화 바로알기 전국수필공모(대상)
▶ (현) 청주공업고등학교 생활지도사

 

 

무두리 계곡을 찾아


 오 영 환

모처럼 밝은 햇살이 온 대지를 환히 비춘다. 길가의 가로수 잎은 바람결에 너울너울 춤을 추고 들녘의 곡식은 반가운 듯 얼굴을 살며시 내민다. 그러면서 조금씩 영글어간다. 그동안 건강 문제로 서울의 아산병원에서 고생을 많이 한 사돈이 궁금했다. 나와는 같은 직장에서 오랫동안 친구같이 지냈고 지금은 며느리의 친정아버지이다. 오래전부터 산을 좋아하고 가끔 산행을 함께 하기도 했다. 오랜만의 쾌청한 날씨가 너무도 반가워 사돈과 함께 충북 옥천에 있는 무두리 계곡을 찾기로 했다.
 
  달리는 차 창 안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산 계곡의 나뭇잎은 더욱 푸르르고 싱싱해 보인다. 멀리 산 중턱에는 밤나무의 흰 꽃이 활짝 피어있다. 그것도 혼자서는 외로운지 이곳저곳에 짝을 이루듯 모여 산다. 그러면서 밤나무 특유의 향 香내음을 멀리까지 토해낸다. 아마 꿀벌이 그리운 것일까? 이처럼 계곡을 가는 길은 나의 오감을 시원스레 열어준다.

   무두리 계곡에서. 중년 노인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준다. 알고 보니 몇 달 전 사돈과 함께 서울의 아산병원에서 같은 병실을 사용했던 입원 동기생이다. 건강한 모습이 완연했다. 산에서 캐온 귀한 칡으로 차 茶를 만들어 한잔 씩 권해준다. 산중 생활은 초년생이라고 하지만 허름한 옷차림에 맥 고자를 쓰고 검게 그을 린 얼굴은 자연인을 방불케 한다. 더욱 턱수염은 오래도록 잘 가꾼 듯 이색적이다. 그러면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흔적이 역력했다. 사연을 들어보니 몇 해 전 세무공무원으로 근무하다 정년을하고 산과 나무가 친구같이 좋고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덕대산을 찾았다고 한다. mbn 방송에서만 보았던“나는 자연인이다”프로를 직접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새로웠다.

  계곡 뒤로는 덕대산 德垈山이 보인다. 해발 573m의 높은 산으로. 일년내내 울창한 소나무 숲이 우거져있고 가을에는 빠알간 단풍잎이 곱게 물들어간다. 오늘따라 계곡에는 하얀 물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른다. 그러면서 그 물안개는 산 정상을 향해 천천히 솟아오른다. 희소성이 짙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폰 에 저장도 했다.

  자연인의 텃밭에는 고추를 비롯하여 옥수수, 참깨, 감자, 고구마, 등이 영글어간다. 깊은 산속의 텃밭 농장이다. 그런데 밤에는 산짐승이 자주 나타나 곡식을 해친다. 생각 끝에 훈련이 잘된 진돗개 3마리를 배치했다. 낯선 사람이 다가가니 거부감이 생기는지 소리높여 짖는다. 그중 한 마리는 눈을 감고 자기 집에 누워있다. 가까이서 보니 목 부위에 털도 많이 빠지고 깊은 상처도 났다. 어젯밤 산짐승과의 싸움에서 다친 상처라고 한다. 텃밭의 곡식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말을 못 하는 짐승이지만 얼마나 아팠을까? 동물병원을 가려 해도 70리가 넘는다고 한다. 자전거뿐이 없으니 막막했다. 누워있는 개가 서글프고 처량해 보인다. 문득 승용차에 있는 상처치료제“퓨시드산 나트륨”연고가 생각났다. 사람에게 바르는 약이지만 개에게도 효험이 있을 것 같아 10g 정도를 발라주고 흰 천으로 동여매 주었다. 고마운 듯 꼬리를 흔들며 조금씩 걷기도 한다.“후유”하고 한시름 놓았다.
  밭이랑에는 빗물이 여기저기 고여있어 성큼성큼 건너뛰기도 했다. 산비탈 밭이라 그런지 돌이 많고 질척질척한 흙은 운동화에 잔뜩 묻어난다. 긴 수염을 늘어뜨린 강원도 옥수수와 검푸른 잎으로 몸을 숨긴 고구마는 하루가 다르게 커간다. 이뿐인가? 밭둑에는 감나무를 비롯하여 대추, 밤, 매실 등이 줄지어있다. 그런데 대추나무는 병색이 역력했다. 오갈병에 걸린 것이다. 꽃눈이 잎으로 변하는 엽화현상 葉化現象 때문에 꽃이 피지도 못하고 열매도 열리지 못한다. 아마 마름무늬 매미가 균을 전염시킨 것 같다. 병든 대추나무를 캐내기로 하고 옥천의 지인에게 알려 묘목 5주를 급히 가져왔다. 자갈이 많은 밭둑이라 그런지 삽질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이마에서는 땀이 흐른다. 안쓰러운 듯 아내가 수건을 가져와 목에 결어준다. 이때 자연인은 산에서 캐온 더덕을 삼겹살에 얹어 굽는다.

  적쇠 위에서 피어나는 가느다란 연기는 계곡을 향해 살며시 사라진다. 그러면서 더덕의 향 香내음은 내 가슴을 파고든다. 원두막에 둘러앉아 점심을 나누니 텃밭의 고추가 나를 바라본다.
  앞뜰에는 노오란 접시꽃이 한송이 곱게 피어있다. 일조량이 짧아서인지 꽃잎이 작아 보인다. 아침에 내린 이슬은 아직도 꽃잎에 맺혀있고 떨어질 듯 하면서도 햇님을 기다린다. 천천히 거두어 가라고 사정을 하는 것일까?

  문득 어느 시인이 쓴“접시꽃 당신”이 떠오른다.‘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중략.’
  부인을 잃고 애절한 마음을 접시꽃에 비유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구구절절 담은 시이다. 이 시는 읽고 또 읽어도 가슴이 저려온다.

  지난 여름 어느 날, 늦은 밤이다. 서고를 정리하던 아내는 갑자기 어지럽다며 거실 바닥에 쓰러진다. 왜 그러느냐고 아내를 흔들어도 응답이 없다.
 가슴이 뛰고 긴장이 나를 억누른다. 급히 충북대학 응급실로 옮겨져 응급처치 후, 날 새기를 기다렸다. 다음날 정밀검사를 거친 후 대수술을 받고 가까스로 목숨만을 건졌다. 일평생을 살면서 이렇게 아내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아내여 사랑한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홀로 외롭게 핀 접시꽃을 바라보니 아내의 얼굴이 새삼 그려진다.

  무두리 계곡에는 맑은 물이 제법 콸콸 소리 내며 흐르고 돌 틈을 이리저리 비집고 쉼 없이 내려간다. 어쩌다 바위에 부딪치면 새하얀 물보라가 생기며 없어졌다가는 또다시 생긴다. 어쩜 그렇게도 물이 맑을까? 물속의 모래알이 비칠 정도다. 두 손으로 물을 담아 서너 번 마시니 속이 다 시원하다. 발이 시리다. 너럭바위에 앉아 있으니 앞산에서는 뻐꾸기가 울고 덩달아 참새도 조잘댄다. 자연의 내음이 상쾌해진다.

  계곡에서는 손님처럼 여기는 아주 귀한“버들치”물고기가 보인다. 어느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유분망 하다. 가까이서는 어린 아기와 엄마가 함께 튜브를 타며 즐거워한다. 아기는 물속으로 쓰러질 듯 하다가는 금방 엄마의 손을 잡는다. 그러면서 엄마 품에 안긴다. 조금 추운 듯 아기의 입술이 파래진다.

   추억이 가득한 계곡의 하루였다. 공교롭게도 아내와 사돈 그리고 자연인은 건강하고 새 삶을 살아간다. 깨끗한 물과 숲에서 토해내는 맑은 공기는 행복의 여유를 안겨준다. 빠르게 넘어가는 해가 밉기도 했다. 저녁나절이 되어 무두리 계곡을 뒤로한 채 청주를 향하니 여름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그러면서 차창으로 소리 없이 흐른다. 다가오는 가을엔 덕대산을 꼭 찾아야지 하며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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