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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다시 1945년 8.15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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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다시 1945년 8.15를 생각한다.
  • 인터넷뉴스팀
  • 승인 2008.08.1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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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 낮이었다. 거리에 확성기를 내건 라디오에서 무겁게 가라앉은 일본왕의 육성으로 '무조건항복' 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처음엔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사실이 일본의 항복으로 밝혀지면서 거리는 갑자기 환호성으로 들떴다.

논밭에서는 일하던 농부들은 호미, 괭이를 내던지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어디서 났는지 태극기를 든 행령이 앞서고 뒤에 남녀노소 시민, 농군들이 줄을 지어 “대한민국만세”를 외쳐댔다. 감격의 순간은 그렇게 왔다.

1942년 12월8일 예고도 없이 일본전투기가 하와이 진주만 미군함대를 폭격하면서 발발한 태평양전쟁에 승승장구하는 줄 알았던 일본군이 역부족으로 패퇴하면서 히로시마등지에 원자탄세례를 받고 무조건항복을 함으로써 끝났다.

미 극동군 맥아더사령관이 8월 14일 미조리 함상에서 일본 왕에게 Yes, No 를 담판하여 Yes를 받아낸 것이다. 잔학무도하고 기고만장한 일본군국주의자들이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태평양재패의 몽상에 빠져 저지른 대재난이다.

섬나라 일본 야만적 기질의 군벌이 득세하면서 부단히 이웃나라를 침범하다가 마침내 조선의 말기적 허점을 틈타 식민지화하고 36년간을 수탈 통치했다.

질곡의 세월이 종식되는 날 중국 상해에서 한국독립임시정부를 이끌고 있던 김구(金九)선생은 기뻐하기에 앞서 땅을 치고 탄식했다. “아뿔싸 우리 손으로 일본을 처치했어야 했는데 남의 힘에 넘어가다니” 아니나 다를까 뒤늦게 참전한 소련이 북한주둔 일군의 무장해제를 시킨 것이 화근으로 남북이 분단되고 만 것이다.

일본이 패망하는 날까지도 일본수상으로 전쟁을 일으켰던 전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굴욕항복”이라고 불만을 터뜨리고 계속 항전을 촉구했다.

도조는 일본이 가진 힘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았다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지만 일부 지식인들은 도조의 생각대로 전쟁을 계속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참화를 당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에도 망국적 군국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양심적 지식인도 있었다.

일본의 패망일 이자 한국의 광복절을 기해 한국에 온 일본역사학자 자타니 주로쿠(茶谷十六·67) 씨는 중국인 학살광산으로 유명한 일본 아키타(秋田) 현의 하나오카(花岡) 광산엔 태평양 전쟁당시 중국인포로 1000명중 419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밝히고 이 탄광에는 강제 징용된 한국인이 4000명이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고령의 한국인 생존자들을 만나 하나오카 진상을 밝히겠다고 한다.

일본인들에게는 기억하지 않으려는 불행의 역사지만 당시 한국인들이 겪었던 아픔을 자세히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것이다.

해방 63주년 정부수립 60년을 맞은 오늘 8.15광복절에 우리는 치욕의 역사지만 되돌아보면서 일본에 강점당한 배경과 역사 일본군국주의의 발악과 독도문제 등 현안에 추호의 소홀함이 없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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