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19 19:29 (금)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2주년을 추모하며
상태바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2주년을 추모하며
  • 이 량 기자
  • 승인 2018.02.23 20: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사진은 단재 신채호 선생 존영.
지난 2018년 2월 21일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중국 랴오닝성 다롄의 뤼순감옥에서 순국한지 82주년이 되는 아주 뜻깊은 날이었다.
그리하여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2주기 추모기념행사가 2018년 2월 21일(수) 오전 10시 30분, (사)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회장 유인태) 주관으로 단재 신채호 선생 사당 및 묘정(청주시 낭성면 귀래리 소재)에서 열렸다. 이날 추모식에는 강윤진 대전지방보훈청장, 서상국 광복회 충북지부장을 비롯한 각계인사와 독립운동 관련 사회단체 대표 및 회원, 유족, 시민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신채호 선생 사당에서 열린 추모제를 시작으로 묘정에서 단재 선생 약력 보고, 유인태 기념사업회 상임대표의 헌사와 추모사, 헌화, 단재의 노래 제창 순으로 엄숙하게 진행했다. 그리고 신채호 선생의 출생지인 대전에서는 위령제를 올리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행사 없이 조용히 보내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인태 기념사업회 상임대표는 헌사에서 "단재 선생은 어려운 시기 국권 수호와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면서 "그의 삶과 정신은 지금도 우리의 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넋을 기렸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1880년 12월 8일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어남리(現 대전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신광식(申光植)이며 모친은 밀양박씨이다. 본관은 고령신씨이고, 호는 단재·일편단생·단생이며,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이다.
어릴 적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로 부터 한학을 익혔고, 1897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그는 성균관에서 개화사상을 접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해 적극 활동하였다.
1905년 4월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바로 사직한 그는 그 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 진출을 포기하고 ‘황성신문’에 논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양기탁의 요청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약하며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민족이 힘쓸 것을 역설하였다.
1907년 안창호, 이갑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 ‘신민회’의 창립에 참가하여 신민회의 이념을 논설에 반영하는 등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선생은 그 해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기호흥학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언론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뿐만 아니라,『독사신론』을 비롯한 많은 역사 관련 서적을 저술하여 근대민족사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1909년에는 친일조직인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는 데에 앞장섰다. 1910년 4월에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평안북도 오산학교를 거쳐 중국 칭다오(靑島)로 망명, 그곳에서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조직된 항일단체인 권업회(勸業會)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인 권업신문(勸業新聞)에서 주필로 활동하다가, 1914년 이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그 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 일대 부여, 고구려, 발해 유적지 등 한국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했다. 1915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 조직에 참가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에도 힘썼다. 베이징으로 건너가 비밀결사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고, 신대한청년동맹(新大韓靑年同盟) 부단주(副團主)가 되었다.
1919년 상하이에서 거행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으며, 의정원(議政院)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한성임정(漢城臨政)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임시정부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맞서기도 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소수의 의견만으로 소집되어 불완전한 상태이며 항일운동을 전개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조직구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주장했기에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부적절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으며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자는 창조파(創造派)의 주동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안창호, 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개조파와 대립하여 임시정부의 존폐문제를 논했으나 논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신채호는 다시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항일비밀단체인 다물단(多勿團)을 조직에 가담하여 지도했으며, 본국의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논설과 역사논문을 발표했다.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 1928년 잡지『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基隆港)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중국 랴오닝성 다롄의 뤼순(旅順) 감옥 독방에서 복역 중 1936년 2월 21일 옥사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평생 문인으로, 언론인으로, 역사학자로, 항일독립운동가로 조국의 발전과 독립을 위해 희생 봉사했다. 특히 단재 신채호 선생은 적과 타협 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古朝鮮)과 묘청(妙淸)의 난(亂)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하고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리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란 자아와 피아의 끊임없는 투쟁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유명한 어록을 남 겼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런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최근 뉴라이트 계열의 주류사학자인 권희영에 의해 ‘또라이’ 또는 ‘정신병자’로 매도당한 적이 있어도 대부분의 충청권 언론기관과 시민단체에서 침묵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신채호 선생이 대전에서 태어나 8년 동안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지방자치단체의 홍보 부족으로 상당수의 대전지역 주민들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가지가 대전 중구 어남동에 위치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어, 단재 신채호 선생에 대한 지역 차원의 관심이 요구되고 있다. 반면 신채호 선생 묘소와 사당이 있는 충북 청주시의 경우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와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등의 민간조직과 국가보훈처, 충북도, 청주시 등 국가기관과 지자체의 체계적인 관리를 통해 전국적인 규모로 충북이 자랑할 수 있는 지역 인물로 부각시켜 나가고 있어 대전과 대조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필자가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2주기를 맞이하여 단재 신채호 선생을 홍보하고 대전시의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중앙로를 단재로로 명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전국에 '중앙로'라는 명칭이 무려 99개가 있어, '중앙로'라는 도로명이 지역의 특색을 살릴 수 없는데다가 권위주의 시대의 낡은 잔재라는 지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구 어남동에 이미 단재로가 개설돼 있지만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대전 시민들의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도로 명은 지역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잘 나타내 주기 때문에 지역이나 나라를 빛낸 대표적 인물의 호를 활용하는 실례가 많다. 서울 중심가에는 세종로, 충무로, 을지로, 퇴계로가 있다.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에는 계백로가 있고, 천안에는 충무로가 있다. 
둘째 대전역 광장에서 해마다 8·15광복의 감격을 경축하는 행사가 개최되고 있는 만큼 대전역 광장에 단재 동상을 세우고 '단재 광장'으로 명명해 대전의 정체성 확립과 옛 도심 활성화를 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대전교육청이 중심이 돼 단재 신채호를 기리고 알리는 향토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넷째, 대전광역시와 중구청이 단재 신채호를 기리는 다채로운 행사를 해 단재 신채호 선생의 위대한 업적을 영원히 기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에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
다섯째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신채호 선생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계속 개최해 신채호 선생의 진면목을 밝혀야 한다.
여섯째 한국정부가 지난 1992년에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 복원해 놓은 기념물 26호인 신채호 선생 생가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해 침체된 지역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
일곱째 관계 당국이 어느 누구도 신채호 선생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