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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회 중봉충렬제 기념 중봉 조헌 학술세미나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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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회 중봉충렬제 기념 중봉 조헌 학술세미나 개최
  • 중앙매일
  • 승인 2017.10.24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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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신상구 충청문화연구소장.

2017년 10월 13일 오후 2시부터 약 2시간 30분 동안 제42회 중봉충렬제 기념 중봉 조헌 학술세미나가 옥천읍에 위치하고 있는 충북도립대학 미래관 합동강의실에서 김영만 옥천군수, 배천조씨 문열공파 종회 조중영 회장, 옥천향토사연구회 회원 등 1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옥천향토사연구회 이재하 회장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주제 발표는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신상구 국학박사, 카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이하준 명예교수가 했고, 토론에는 충남대학교 한문학과 박우훈 교수, 충북도립대학 자치행정학과 김종구 교수가 참여했다.
대산 신상구(辛相龜, 67세) 국학박사는「중봉 조헌의 생애와 업적」을, 이하준 박사는「김포의 얼 : 김포가 낳은 큰 인물 중봉 조헌」을 각각 발표했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 선생은 경기도 김포 출신으로 일평생 관료, 유학자(성리학자), 교육자, 문인, 의병장으로 활약을 해서 업적을 다양하게 많이 남겼다. 그런데 중봉 조헌 선생은 의병장으로서만 널리 알려져 있어 안타깝다.
그는 24세에 과거에 급제해 정주-파주-홍주목의 교수와 교서관의 저작?박사(博士)를 거쳐 예조좌랑, 통진현감, 공조좌랑, 전라도사, 종묘서령, 보은 현감, 공주목 교수 겸 제독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개혁, 교육개혁, 세제개혁, 국방개혁에 앞장섰다. 특히 중봉 조헌 선생은 서인의 행동대장으로 조선의 엄격한 신분질서 하에서도 하층민인 서리, 서출, 노비들의 편에 서서 일을 했다. 서리들이 부정부패를 하지 않도록 서리(향리)들의 녹봉을 인상하고, 노비 수를 대폭 줄여 양민으로 전환하는가 하면, 서출과 노비들도 능력이 있으면 관리로 등용할 수 있도록 관리채용제도를 개선했다. 한편 그는 청춘과부의 개가(改嫁)를 허용해 여성 해방에도 많이 기여했다.     
그는 실천적인 성리학자로서 유학을 천명하고 충절의 의리와 효를 실천하여 한국 도학의 정통을 계승함으로써 문묘(文廟)에 동방 18현(賢)으로 배향되었다.
그는 1584년 겨울 보은현감을 그만두고 충북 옥천군 안읍 밤티로 낙향해 은거하며 서당인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제자를 양성하면서 학문연구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서당인 이지당(二止堂)에서도 제자를 양성했다.
그는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의 고경명과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와 정인홍과 함께 충청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동년 5월에 보은 수리치제(車嶺)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수차례 의병을 규합하여, 8월 1일에 의병장 영규(靈圭)와 함께 청주성을 탈환했다. 곧이어 의승장(義僧將) 영규(靈圭)와 함께 8월 18일 왜군에게 함락당한 금산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후원군이 없는 상태에서 무기 열세, 훈련 부족,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모두 장렬히 순국하였다. 왜군들도 타격을 입고 퇴각함으로써 당시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이 회복되었다.     
그는 10세 때 친어머니 차씨(車氏)를 여의고 계모 김씨(金氏) 밑에서 성장했는데, 계모 김씨를 친부모처럼 잘 봉양하고, 전투에 임할 때에는 먼저 계모 김씨를 선유동으로 안전하게 피신시키고 난 후 전장(戰場)으로 나감으로써 효(孝)를 실천했다.     
그는 후율정사와 이지당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옥천 금천(錦川)과 서화천(西華川) 일대에 분포하는 율원구곡(栗原九曲)의 아름다운 산수명승(山水名勝)을 읊은 율원구곡시(栗原九曲詩)를 창작해 옥천의 한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율원구곡(栗原九曲)은 중국 주자(朱熹)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모방해 설정했고, 율원구곡시(栗原九曲詩)는 중국 주자(朱熹)의 무이도가(武夷棹歌)를 차운해 지은 서정시이다.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표충사 앞에 세워놓은 중봉 조헌 시비


중봉 선생 관련 유적으로는 조헌 선생 유허 추모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0호), 우저서원(牛渚書院,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10호), 후율정사(後栗精舍) 터, 후율당(後栗堂, 충북기념물 제13호), 이지당(二止堂, 충북유형문화재 제42호), 율원구곡(栗原九曲), 가산사(佳山寺), 중봉 조헌 묘소, 표충사(表忠祠, 충북문화재자료 제20호), 신도비(神道碑, 충북유형문화재 제183호), 칠백의총(七百義塚, 사적 제105호), 중봉 조헌 선생 일군 순의비(殉義碑), 중봉 선생 祠堂(충남문화재자료 제20호), 수심대(水心臺, 충남문화재자료 제26호), 조헌 전장기적비(趙憲 戰場記蹟碑, 충북 시도유형문화재 제136호), 후율사(後栗祠, 충북기념물 제15호), 상현서원(象賢書院, 충북기념물 제43호)이 남아 있다. 그리고 중봉 선생 관련 유물로는 조천일기(朝天日記), 조헌문과급제교지(朝憲文科及第敎旨), 교서(敎書), 중봉전집(重峯全集), 제문(祭文), 선조대왕교서(宣祖大王敎書), 항의신편 목각판(抗義新編 木刻板), 화살통 등이 있다. 또한 중봉 선생 관련 행사로는 김포 중봉문화제, 우저서원 제향(춘향제, 탄신제, 추향제), 중봉 충렬제(추모제), 칠백의총 위령제, 청주 중앙공원 의병추모제 등이 있다. 
중봉 조헌 선생의 생애와 학문을 고찰해 본 결과 중봉 조헌 선생은 충효(忠孝) 사상, 교육입국(敎育立國) 사상, 절의(節義) 사상, 개혁(改革) 사상, 도학정치(道學政治) 사상, 풍류(風流) 사상 등을 신봉했음을 알 수가 있다.  
중봉 조헌은 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鄭汝立, 1546-1589) 모반사건과 1592년 4월 14일 일어난 임진왜란을 미리 예언하고 대비책을 강구해 여러 차례 상소할 정도로 선경지명(先見之明)이 있는 실천적인 성리학자였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동방 18현으로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 되었다.
저서로는『중봉집(重峰集)』,『조천일기(朝天日記)』,『동환봉사(東還封事)』,『항의신편(抗義新編)』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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