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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인(文明人)과 문화인(文化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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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인(文明人)과 문화인(文化人)
  • 중앙매일
  • 승인 2017.08.2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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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서병규 주필.

지혜가 열리고 생활양식이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 우리들의 생활을 편리하고 쾌적하게 해주는 과학기술의 발달 상황을 ‘문명(文明)이라 표현할 때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확실히 높은 수준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할 것이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각종 문명의 이기들 덕분에 인간의 생활은 많이 달라졌다. 그런 변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삶의 내용과 질(質)면에서 행복하기만 하고 만족스럽고 따뜻하기만 하지는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매일 아주 넓게 전파되는 매스컴의 글이나 전파를 타고 전달되는 뉴스, 정보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있으니 말이다. 분명 문명이 우리에게 선물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다.

마음의 밭을 가는 게 문화(文化)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물질적 측면의 진보나 발전이었을 뿐 정신적 평안과 안락, 행복(幸福) 사랑 등과는 거리가 참으로 먼 것들이었다. 그래서 세인들은 현대를 비인간화, 자아상실, 물질만능 시대라 부정적 시각에서 평가를 하기도 하는 것 같다.
삶의 애환(哀歡)속에 깔린 문제들, 인간의 참모습, 어떤 것이 바람직한 삶의 참모습인지, 선과 악은 과연 무엇인지 인간다운 삶의 조건은 무엇인가 등등은 문명의 발전이나 향상, 진보에서 반드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문화(文化)가 밝혀줄 수 있을 뿐이다. 문화(culture)는 그 어원이 라틴어의 ‘밭을 갈다’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지성과 감성(感性)의지를 균형 있게 개발 순회시켜 조화로운 인격을 형성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사람이 바르게 살아갈 길을 안내하는 것이 곧 ‘문화(文化)의 역할이라 설명한다. 따라서 문명과 문화는 동시에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별개로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난날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제자들과 함께 불도를 전파하기 위해 먼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 농부가 물었다. “수행자들이여, 지금은 농번기라서 모두가 매우 바쁜 시기인데 논밭을 가는 일을 돕는 게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라고....
석가는 “저도 논밭을 갈고 있습니다.”라고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하자 농부는 “농기구도 없이 무엇을 갈고 있다는 것이오?”라며 힐책(詰責)을 하였다. 이에 석가는 “저는 이곳을 갈고 있습니다. 마음의 밭도 내벌여두면 굳어져 잡초로 덮일 것입니다. 마음의 씨도 밭의 씨 못지않게 중요합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밭을 가는 작업, 그것은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지향점, 추구점을 의미하는 소박한 비유인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오늘날 고도의 물질문명의 발달을 이루어낸 것이다.          
대단히 높은 수준의 문명을 자랑하는 집단이나 국가가 문화의 수준에 있어서는 아주 보잘 것 없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경제의 수준보다 월등 높은 문화지수를 갖고 있는 민족, 국가도 있다. 그래서 높은 수준의 물질적 풍요(?饒)를 누리지만 ‘문명화한 야만인’이라는 혹평을 듣는 개인이나 국가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문명만큼의 문화수준(文化水準)이 필요하다

고도의 문명수준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문화의 원시상태에서 맴돌고 있는 무리들을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보고 있다. 농번기에 논밭을 가꾸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논밭을 갈고 가꾸는 일만이 전부이고 마음의 밭을 갈고 가꾸는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거나 논밭을 가꾸느라 마음의 밭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고집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돌보아야 할 것이다.
문화에 비해서 문명의 수준이 낮았을 경우의 불편, 불만, 고통은 근면, 성실, 노력, 인내로 극복을 할 수 있지만 고도의 문명 속에서의 문화의 황폐(荒廢)에서 오는 불안과 불신, 불모(不毛)는 치유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개인도 문명 수준만큼의 문화수준을 갖고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절실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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