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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인권운동가이자 항일독립운동가인 소파 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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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인권운동가이자 항일독립운동가인 소파 방정환
  • 중앙매일
  • 승인 2016.05.09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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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신상구
▲ 소파 방정환 선생 동상.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1899-1931) 선생이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처음으로 제정하고 기념식을 올렸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부터는 5월 5일에 기념식을 올리고 다양한 행사를 한다. 그래서 2016년 5월 5일은 94회 어린이날이 되는 뜻 깊은 날이다. 
   어린이는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꿈나무들이다. 그런데 요즈음 어처구니없게도 신문과 방송에 어린이 학대와 살해 보도가 끊이질 않아 우리 모두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있다.
   오늘의 어린이들이 옛날의 어린이들보다 옷을 잘 입고 먹는 음식도 좋아진 것은 사실이나, 오늘의 어린이들이 옛날 어린이들보다 더 행복한 것 같지는 않다. 부모가 아이들을 진정어린 순수한 사랑으로가 아니라 어른들 특유의 허영심으로 키우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일찍이 어린이의 소중함을 깨닫고 ‘아동’을 ‘어린이’라는 용어로 격상시키고, 아동문제연구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했으며,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여 어린이 보호와 권익신장에 많이 공헌한 선각자이다.

   방정환 선생은 1899년 11월 9일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5가길 5 야주개(당주동)의 온양방씨 가문에서 방경수(方慶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상인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시절을 보내다 집안의 사업실패로 부침을 겪기도 했다. 비록 체구는 작고 말랐지만 얼굴이 인자해 보였고 눈빛 하나는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5세 때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웠다. 7세 때에 부모의 허락도 없이 소성 소학교에 다녔으나 너무도 가난하여 소학교를 마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왕고모 집으로 옮겨 1913년 미동보통학교 졸업하고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가정 사정으로 2년만에 중퇴하였다. 조선 총독부 토지 조사국에 취업해 우리의 국유지를 총독부 소유로 이관하는 일과 농민들의 생활 터전을 빼앗는 일을 하다가 자존심이 상해 이를 박차고 나와 천도교 예배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1917년에 항일독립운동가로 천도교 제3세 교주를 역임한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선생의 딸인 손용화(孫溶嬅)와 결혼하였다. 1861년 4월 8일 충청북도 청원 출생의 손병희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으며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방정환 선생은 1917년 신혼기간 중에도 청년운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청년구락부는 항일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잡지『신청년』을 발간했다. 방정환 선생은 <신청년> 제1호에 시 <암야>를 발표했다. 시 <암야>는 방정환 선생이 3.1독립만세운동 직전에 어떤 심경이었는지 실감나게 잘 표현하고 있다.
   “가을밤의 어두움 속이나 점점 깊어 가는 침묵 속에 안주할 수는 없었다. 떨쳐 일어나 눈을 크게 떠야 한다. 백만 신도를 자랑하는 천도교 교주 사위가 아니냐. 그런 장인이 뒤를 봐주는데 무엇이 걱정이랴. 사위 방정환이 무엇을 하든 장인은 믿는다. 눈빛 하나만을 보고 딸을 선뜻 내준 분 아니야.” 
   1918년 천도교가 운영하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학업에 정진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주일 만에 석방되었다.
   3ㆍ1운동의 기세가 꺽일 무렵, 그는 짐을 싸들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1920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천도교 기관지인『개벽』에 번역동시 '어린이노래-불켜는 아이'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방정환 선생은 본격적으로 어린이라는 용어 보급에 나섰다.
   1921년 김기전(金起田)?이정호(李定鎬) 등과 함께 문예, 체육 등의 활동을 통해 어린이에게 정서와 건강과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이솝우화』,『그림동화』,『아라비안나이트』등을 번역했다. 
   1922년 5월 1일에는 어린이들이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고 어린이에 대한 애호사상을 앙양하기 위해 처음으로 ‘어린이의 날’을 제정했다. 그리고 외국동화를 번역한 것을 모아 우리나라 최초로 <사랑의 선물>이라는 동화책을 펴내고, 아이?아해?아동?애새끼라는 낮춤말을 어린이라는 말로 쓰기 시작했다. 1923년 3월에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 넣어주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인『어린이』를 서울 개벽사에서 창간하였다. 창간 직후에는 보름에 1회꼴 발행을 목표로 했으나 곧 월간체제로 전환된 '어린이'는 아이들을 위한 내용과 편집으로 발간 초기부터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동요와 동화가 큰 사랑을 받았는데 동요 '고향의 봄', 동시 '까치까치 설날', 동화 '호랑이와 곶감' 등의 인기에 힘입어 아동문학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고한승, 윤극영, 이원수 등 1세대 아동작가들의 활약으로 아동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겨났다. 같은 해 5월 1일에는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장을 배포하였다. 그리고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창립했다. 이 색동회에는 윤극영, 마해송, 윤석중 등이 가입했다. 이 무렵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쓰자고 주장했고, 어린이의 인권을 처음으로 주창했다. 그러나 소파 방정환 선생은 스트레스성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마에 시달렸다.
   1924년에는 전국을 다니며 강연회와 동화구연을 했고, 1925년에는 제3회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동화구연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928년에는『어린이』잡지사 주최로 세계 20여 개 나라 어린이가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한편 방정환 선생은 번안 및 개작 작가, 동화작가, 동화구연가, 아동잡지 편집인으로서  『사랑의 선물』(개벽사, 1922)을 비롯한 본격적인 개작 번안, 창작동화를 남기며 최초의 대표적인 구연동화가로 활약했다. 그리고『어린이』잡지를 통하여 윤석중(尹石重)·이원수(李元壽)·서덕촌 등 아동문학가의 발굴, 육성에 힘썼다. 특히 방정환 선생은 아동들을 소박하고 천진난만하며 순진무구하게 보고 감상적·관념적·권선징악적인 작품을 통해서 그들이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린이의 현실적·경제적 어려움을 이해하고 종래의 전통적인 부당한 대우를 시정하여 감성 해방(동심 회복)을 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1931년에는 ‘내일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고 아동 예술 강습회 등을 열었다. 연단에서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어느 날,  안색이 창백해지며 코피를 흘렸다. 사람들이 연설을 멈출 것을 부탁했지만 말을 듣지 않고 연설을 계속하다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입원한 지 일주일 만인 1931년 7월 23일 방정환 선생은 겹친 피로와 고혈압으로 향년 32세를 일기로 요절하여 그의 시신은 망우리 묘소에 안장되었다.
   과로로 멈춘 32세의 청춘, 그가 남긴 마지막 말…
   "이제는 가야겠어, 문간에 마차가 와 있어", "어린이를 부탁해…"
   그리고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세상은 망해가는 데 철없이 고운 옷만 입고 싶단 말이냐"<소년소설 '호랑이 똥과 콩나물'>
   "거짓말로만 살아가는 놈들의 세상 나는 일일이 들춰내야 한다"<사회풍자 소설 '은파리'>
   조선의 미래를 어린이에 걸었던 사회운동가 소파(小波) 방정환의 '잔물결'
   “나의 일이 당장엔 큰 효과가 없겠지만 '잔물결小波'처럼 쉬임없이 조선에 물결치게 될 날이 올 겁니다”
   방정환 선생 사후에『소파전집』(박문출판사, 1940),『소파동화독본』(조선아동문화협회, 1947),『방정환아동문학독본』(을유문화사, 1962),『칠칠단의 비밀』(글벗집, 1962),『동생을 찾으러』(글벗집, 1962),『소파아동문학전집』(문천사, 1974),『소파 방정환 평전』(스타북스, 2014.5.5) 등 9종이 발간되었다.
           
   1957년에는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소파상(小波賞)’이 제정되고, 1971년에는 40주기를 맞아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으나, 1987년 5월 3일 서울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으로 이전되었다.
   1983년 5월 5일에는 망우리 묘소에 이재철이 비문을 새긴 ‘소파 방정환 선생의 비’가 건립되었고, 1987년 7월 14일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1978년에 금관문화훈장이 수여되었고, 1980년에는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일평생 어린이 인권운동가로, 항일독립운동가로, 동화작가로 활약하다가 32세에 요절한 애국지사이다.
   정용서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연구교수는 방정환 선생에 대해 "어린이를 미래 주체로 발굴하고 의식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킨 인물"이라며 "아동 인권을 실체로 이끌어 낸 사상가이자 운동가였다"고 평했다. 또한 "기획, 편집, 활동 등 다채로운 능력을 뽐냈던 재주꾼"이라며 "동화구연을 할 때면 청중을 들었다 놓았다 할 만큼 달변가이기도 했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어린이날 제정 94주년을 계기로 하여 관계 당국과 시민단체들이 소파 방정환 선생의 숭고한 어린이 사랑과 존중 정신을 이어받아 협조체제를 유지하고 어린이 학대와 살해 사건을 조속히 근절하는 한편 어린이를 잘 보호하고 교육하여 훌륭한 인재로 육성함으로써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명실상부한 선진민주복지국가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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