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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호국영웅 이장원 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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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호국영웅 이장원 중위
  • 중앙매일
  • 승인 2016.03.28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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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보훈지청, 우리고장 호국영웅 알리기 여덟번째

 이장원 중위는 1929년 2월 11일에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에서 태어났고,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에 해병사관후보생 5기로 입대해 같은 해 9월에 소위로 임관했다.

  그 후 적 후방 교란 및 해안봉쇄 작전을 수행하는 해군을 엄호할 목적으로 창설되어 함경남도 영흥만 봉쇄선상의 요충지인 5개 도서를 장악하고 있던 해병 독립42중대 소속 황토도(黃土島) 파견소대장으로 부임해 최전선에서 적과 대치했다. 황토도는 원산 동쪽에 위치한 갈마반도 앞 바다의 조그마한 섬으로써, 육지에서 박격포 사거리 내에 위치해 있었다.

  1951년 5월 23일에 북한군 20여 명이 1차로 황토도 점령을 기도한 데 이어 다음날 전마선 5척에 승선한 100여 명이 2차 기습작전을 감행해 왔지만, 우리 해병대가 이를 모두 격퇴했다. 이후 적은 거듭된 패배에 자신감을 잃고 해안지역에 병력을 증파하며 아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북한군의 3차 침공이 있던 1951년 11월 29일 밤은 풍랑이 심하고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황토도 파견소대는 제1분대가 동남지역 해안을 · 제2분대가 서남지역 해안을 담당했고, 제3분대는 갈마반도를 바라볼 수 있는 서북단지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비대를 보유하지 못해 야간방어에 취약했다.

  1시 30분경 북한군 제25여단 소속 150여 명의 적이 5척의 목선에 분승해 황토도 동남쪽 100m 연해까지 은밀하게 접근한 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예광탄을 쏘아 올렸다. 이를 신호로 적은 낭성리-갈마반도-성북리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120㎜ 박격포 · 75㎜ 대전차포 · 중기관총 등을 이용해 황토도에 집중 사격을 가하는 동시에 황토도 동남단 일각으로 상륙을 시작했다.

  그러나 제1분대는 이러한 적의 상륙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가 적의 돌격상륙신호인 청색 신호탄이 50m 전방 해상에서 발사되고 난 후에야 적의 침공을 알게 되었다. 제1분대장은 즉각 전 분대에 사격명령을 내려 예상되는 적의 상륙지점에 소총사격을 집중하는 한편 소대장 이장원 소위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이때 그는 제1분대와 제2분대 중간지점에서 소대의 야간경계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는데, 적의 계획적인 기습으로 판단하고 선임하사관 백남산 이등병조와 함께 제1분대 진지로 향했다.

  제1분대 진지에 도착한 그는 우선 분전 중인 분대원들을 격려했고, 적의 포격이 진지에 집중되면서 일단의 적이 진지 앞으로 쇄도하자 분대에 사격을 명령하고 중대장에게 무전으로 상황을 긴급 보고했다. 잠시 후 목선 2척에 분승한 또 다른 적의 병력이 제2분대가 배치된 동쪽 해안으로 상륙을 시도함으로써 제2분대와 교전이 벌어졌다. 이 상황을 보고받은 소대장은 백남산 이등병조를 제2분대에 보내 전투를 지휘하게 했다.
 
  2시경 소대장은 적과의 공방전을 지휘하던 중 제2분대가 급파한 전령으로부터 제2분대의 전황을 전해 듣고 병력을 집중해 최후의 타격을 가하기로 결심하고 모든 분대에 고지 8부 능선의 제2선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소대는 최후의 거점인 제2선을 점령하고 우세한 적을 격멸하려고 했지만 어둠으로 인해 전황은 계속 혼미를 거듭했다. 이처럼 분전이 거듭되는 동안 이장원 소위는 대원들을 독려하며 침체된 사기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했다.

  마침 교전 중 무전기마저 적탄에 파괴되어 본대와 교신이 두절되고 아군의 지원조차 기대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장원 소위는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대원들을 독려하며 적을 격멸하다 진내에 떨어진 적탄을 맞고 부하 3명과 함께 전사했다.

  이 장면을 목격한 대원들은 분기탱천하여 분대장들의 공동지휘 아래 사투를 지속하면서 반격을 감행하여 적진을 향해 돌격했고, 이에 적은 당황한 나머지 상륙했던 지점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해상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목선을 타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3차에 걸친 황토도 침공이 실패로 돌아가자 북한은 병력투입에 의한 직접적인 공격은 더 이상 감행하지 않은 채 병력을 증원하고 포대를 증설하여 영흥만 일대의 해안 방어에 주력하는 한편 도서에 대한 포격을 강화했다.

  정부는 부여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살신보국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이장원 소위를 중위로 특진시키고 그에게 충무무공훈장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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