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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가 안승갑 선생의 생애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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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가 안승갑 선생의 생애와 업적
  • 중앙매일
  • 승인 2015.09.16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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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 낙산 안승갑 선생.

낙산(諾山) 안승갑(安承甲, 1922~1987)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22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죽전리의 순흥안씨(順興安氏) 가문에서 한의사이자 시인인 우성(又省) 안성호(安晟鎬, 1899-1957)와 오선예(吳先禮)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순흥안씨(順興安氏) 시조인 상호군(上護君) 안자미(安子美)의 27세 손이다. 4세인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은 고려 말 원나라로부터 주자학(朱子學)을 처음 들여와서 성리학(性理學)을 꽃피웠다.

8세 양공공(良恭公) 안조동(安祖同, 1345-1388)은 안향의 고손자로 예문관 부제학을 역임했는데 우왕(禑王)이 폐위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자진한 고려조의 충신이다. 12세인 안세현(安世賢)은 조선조에 진천 현감을 제수받았으나 조상의 대를 이어 절개를 지키고자 그 직책을 사양하고 바로 충북 청원군 현도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살았다. 26세인 우성(又省) 안성호(安晟鎬)는 현재 전하는 한시가 86수에 달하는데, 작품 수준이 매우 빼어나고, 한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낙산 안승갑은 부강공립보통학교 재학시 청원군 부용면 금호리의 친구 김상희(金相熙) 씨 집으로 놀러다니던 중 그 동네 항일운동가에게 영향을 받아 현도면 죽전리 배오개에서 소년단과 청년단을 조직하고 야학을 개설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부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음성군 금왕면 전작기수(畑作技手·산업계)로 발령받았다. 이때 요시찰 인물로 고등계 형사가 미행하고 있던 무극리 2구 장기형(張基螢) 씨와 접선한 것이 고등계 형사인 장인찬(張仁贊)에게 발각돼 사찰을 받고 일본군에 입대할 것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일본군에 입대하면 생명을 잃을 가능성이 많아 대신 포로감시를 하는 군속으로 지원해 1942년 6월 부산 서면에서 조선인 군속 3천100여 명과 2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군사훈련이 끝나자 군속들은 배를 타고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으로 파견돼 일본군에게 패해 잡혀 있던 연합군 포로 감시 업무를 맡았다.


인도네시아 자바(Java)에는 1천400명이 배속돼 자카르타, 반둥, 치라참, 스라바야, 스마랑 등의 포로수용소로 배치됐다. 낙산 선생은 자바 반둥(Bandoong)시 일본 제16군 포로수용소 제1분소 제1분견소에서 포로감시 업무를 맡다가 제2분견소 제2분소로 이동해 네덜란드군 포로의 부녀자 억류소(抑留所) 감시 업무를 맡았다.

낙산 선생과 같이 근무한 동료 중에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 싸우던 게릴라군을 이끌어 인도네시아의 독립영웅이 된 양칠성 선생이 있다.

낙산 선생은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4년 12월 29일 한반도에서 수천㎞ 떨어진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일본군이 군속 통제를 강화하자 민족의식이 투철한 군속 10여 명과 함께 항일 조직인 고려독립청년당을 결성해 반둥지구 지부장을 역임하고 기관지인 <활보>를 발행했다.

자카르타 분소를 담당한 이억관(李億觀) ? 김현재(金賢宰) ? 변봉혁(邊鳳赫), 반둥지구를 담당한 임헌근(林憲根) ? 박창원(朴昶遠) ? 문학선(文學善) ? 안승갑(安承甲), 지하미지구를 담당한 이상문(李相汶) ? 박승욱(朴勝彧) ? 손양섭(孫亮燮) 등 고려청년독립당원 10여 명은 일본군으로부터 극심한 차별 대우와 감시를 받았지만, 인근 국가인 필리핀과 미얀마의 독립 선포에 고무되어 독립운동을 시도했다.

실제로 1944년에는 반일화교인 여초화(余超華) ? 정지춘(鄭芝春) ? 진개동(陳開東) ? 진개서(陣開西) ? 진신민(陣新民) 등과 함께  연합군 진주시 협력을 위한 정보 전달 및 반일운동을 했다. 그리고 1945년 1월 4일 오후 3시에는 자바 동부 암바라와에서 고려독립청년당원인 손양섭(孫亮燮), 민영학(閔泳學), 노병한(盧秉漢) 등 3명이 무장 봉기하여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써 일본군 등 12명을 사살하고 장열하게 자결했다.

또한 조선인 군속이 연합군 포로 9만 명을 재무장시켜서 일본군 2만 명을 타도하려는 거사 계획을 세우고, 수송선을 탈취하여 포로들을 연합군에게 인도하려는 계획을 세우는가 하면, 중경임시정부와 연락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누설 체포되어 당원 8명이 실형으로 감옥 생활을 했다.

그런가 하면 영국군 포로 소장(小將) M. Kuneman과 네덜란드인 Blokhart를 포섭하여 연합군 진주시 무장봉기를 하기로 계획하고, Kannabeg 백작과 연합군과의 연락을 돕는가 하면, 억류소 R. van Iterson - Dehartog 여사가 항일운동을 주도하도록 상호협조 했다.


1945년 8월 조국은 해방을 맞이했지만, 낙산 선생을 비롯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1년 반이 넘도록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그들은 '일본군'으로 취급돼 연합군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일부는 B·C급 전범으로 수용소에 갇혔다. 그 당시 낙산 선생은 자치조직인 '조선인 민회'의 지부장을 맡아 등사판 <민회보>를 100호 이상 발행하고, 자바섬에 있던 조선인 인명부를 작성하는가 하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저축한 예금 내용이 담긴 '사금회수증명서'도 기록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1946년 11월에는 지피낭(Jipinang) gudanth 조선인 총반장으로 선출되자 투옥 중이었던 전범용의자들을 석방시키기 위한 탄원서를 제출하여 전원 출감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1947년 2월 치바닥호로 귀국한 낙산 선생은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체불 임금과 위로금 배상 청구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고려독립청년당 활동가들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도록 힘을 기울였다. 또한 네덜란드인 의사와, 한의사였던 부친에게서 배운 의술로 무의촌이었던 고향에서 많은 사람의 질병을 치료해 주었다.

그런가 하면 현도중과 시목양수장 설립 추진, 시목 지만교 가설, 현도 복지회관 건립, 농가방송 토론그룹 회장 역임, 결혼식 주례, 순흥안씨 양공공파 종친회 회장 역임 등 사회봉사활동을 많이 했다.


한편 1956년 서울방송 가요공모에 ‘안중근 의사’와 ‘홍길동’이 당선되어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7년에 현도 우체국 앞에서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66세를 일기로 타계하여 선산인 우록리 이장산(二將山)에 안장되었다.


면민들은 성금을 모아 현도면 복지회관 앞에 안 선생의 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고, 남은 돈으로는 낙산장학회를 설립해 장학금을 주고 있다.


안승갑 선생의 장남인 안용근 충청대 식품영양학부 교수는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고 귀국 후에는 고향발전을 위해 애쓴 아버지가 남긴 유작 원고를 여러 해에 걸쳐 풀이해 3권의 책으로 출간하고, 2014년 10월 17일 오후 2시 청주시 서원구 현도 복지회관에서 100여 명의 하객이 참여한 가운데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안승갑 선생의 호를 딴『낙산유고』는 소설·시·한시·서간문과 함께 독립운동 자료, 일제강점기 군속과 B·C급 전범 자료 등이 담겨 있는데, 등장하는 인물이 무려 3000여 명에 달해  근·현대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오초월 춘추삼국지』는 선생이 1950년대 중국 오나라의 대부 오자서(伍子胥)의 ‘의협정신’으로 국민을 일깨우고자 집필하다. 1987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마무리하지 못한 것을 장남인 안용근(安龍根) 충청대 식품영양학부 교수가 완성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인 기원전 500여 년 전 중국 대륙의 오(吳), 초(楚), 월(越) 나라를 주축으로 펼쳐지는 패권국의 싸움 이야기로 손자병법을 쓴 손무와 함께 오왕 합려와 부차를 모셨던 오자서의 충성과 의리를 주축으로 하는 소설이다.


 『이솝이야기로 배우는 고사성어』는 선생이 일제강점기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정리한 이솝이야기다. 이야기마다 내용에 맞는 고사성어를 덧붙여 누구나 고개를 끄떡이며 '아 그렇구나!' 하면서 고사성어를 익힐 수 있게 했다.


낙산 안승갑 선생은 성격이 차분하면서도 정의감이 강해 국내외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고, 국정 전반에 대해 건의하고 조언하여 사회정의 실현에 크게 기여했다. 학구열이 강하고 문장력이 좋아 저서를 여러 권 저술하고 고려독립청년당사를 정립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으며 예술에도 재능이 있어 서예와 회화 작품도 많이 남겼다. 그리고 외국어(네덜란드어, 인도네시아어, 영어, 한문)에도 능통해 국제적인 업무를 잘 처리했다. 리더쉼이 강해 청원군 행정자문위원, 현도 번영회장, 옥포국민학교 육성회장 등 사회의 주요 직책을 맡아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 그리하여 내무부장관 표창과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조선인 포로감시원 가운데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 있다는 것은 대중에게는 아직 생소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국가보훈처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되거나 항일독립투쟁을 하다가 산화한 독립유공자에게만 포상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안승갑 선생은 공적이 뛰어나고, 많은 기록이 남아 증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족들이 국가보훈처에 낙산 선생의 독립운동 자료를 3번이나 제출해 포상 상신을 했으나 아직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실망이 크다고 한다.


그런데 안승갑 선생이 귀국 후에 고려독립청년당에서 활약한 동지들이 조국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고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힘을 기울인 결과, 고려독립청년당원 중 암바라와 사건으로 산화한 노병찬 ? 민영학 ? 손양섭은 2008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되었던 이억관은 2011년 11월 17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고, 이상문 ? 김현재 ? 문학선 ? 박창원 ? 임헌근 ? 조규홍은 건국훈장 포장을 받았다. 


고려독립청년당 연구의 권위자인 일본의 우쓰미아이코(內海愛子) 교수는 저서인『적도하의 조선인 반란』(勁草書房, 1980.7.15)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군에게 체포되거나 항일독립투쟁을 하다가 산화한 동지들만이 항일독립 유공자인 것은 아니다. 안승갑씨 등 고려독립청년당 조직당원의 끊질긴 항일 독립투쟁 또는 봉사활동도 조선 항일독립운동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여 포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5년 8월 15일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국가보훈처가 안승갑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안승갑 선생이 1947년 1월 19일 치바닥호로 귀국하기 직전에 묻어놓았다는 반동공과대학 교정에 세워놓았던 <대한독립비>를 발굴조사하여 인도네시아 지역 한국독립운동사를 새로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바타비아 일인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3의사의 유골을 봉환하여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반둥 화교가 보관하고 있는 3의사의 의거를 보도한 <활보>를 찾아와 독립기념관에 기증함으로써 영구보존되도록 해야 한다. 


낙산 안승갑은 송석원(宋錫媛)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용근, 봉춘, 학상) 4녀(초근, 보영, 숙영, 유미)를 두었다. 장남 안용근(安龍根)은 충청대 식품영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고, 장녀 안초근(安初根)은 시인으로 대전광역시 동구 용전동에서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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