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19 19:29 (금)
모정의 세월(歲月)
상태바
모정의 세월(歲月)
  • 정광영 기자
  • 승인 2018.10.23 23: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오영환 (청주 복대중 지킴이)

 

약   력 
◆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 (전) 제천교육지원청 교육과장
◆ (전) 청주봉정초등학교 교장
◆ (현) 청주복대중학교 생활지도사
◆ (현) 효동 문학상 수상
◆ (현) 제5회 충북대 수필문학상 수상
◆ (현) 푸른솔문학 신인문학상 수상(수필작가등단)

 

 

내 고향 진천은 산 좋고 물 맑으며 인심이 후덕하기로 소문나있다. 이렇듯 생거진천(生居鎭川)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어머니의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가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생각 날때는 고향의 어머니 산소를 찾아 그리움을 달래고 한다.
오래전 내가 일곱 살 때의 일이다. 가을이 되면 벼가 논에서 누렇게 익고 벼 이삭 사이로 메뚜기가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논에서 날아다니는 메뚜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번번히 놓치고 만다. 함께 온 누님은 그래도 여러 마리의 메뚜기를 잡아 뒤웅박에 담는다. 얼마 지나서 나도 가까스로 두 마리를 잡았다. 무척 기뻤다. 집에 와서 어머니께 두 마리 잡았다고 자랑도 했다. 저녁 밥상에 메뚜기볶음 반찬이 올라왔다. 까칠까칠한 메뚜기 볶음이 고소했다. 며칠 후 벼농사를 거둬들이고 가을 타작을 하니 볏짚이 많이 나왔다. 아버지는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초가지붕과 담장 위를 씌우니 새집이 된 느낌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리모델링을 한 셈이다.
늦은 봄 어느 날! 아버지가 땔감으로 쓰려고 뒷산에서 무성한 잔디를 많이 깎아 지게로 지고 오셔서 우리 집 행랑채 비탈진 추녀 밑에 펼쳐 널었다. 며칠을 말렸는지 잔디 풀은 바싹 마르고 또한 그 양도 많았다. 아마도 서너 짐은 될 것 같았다. 이때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저 마른 잔디 풀에 불을 붙이면 어떻게 될까? 잘 탈까? 하며 집 부엌에 있던 성냥 통을 몰래 가져왔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나는 성냥불을 바싹 마른 땔감용 잔디 풀에다 그어댔다. 삽시간에 불은 번지고 활활 타기 시작했다. 이때 나는 일곱 살의 나이에 너무도 놀라고 당황하여 우리 집 뒷산으로 도망을 가 소나무 밑에 납짝 엎드렸다. 울고 또 울었다. 겁이 났다.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얼마후 어머니와 누님이  울고 있는 나에게 찾아오셨다. 어머니가 나를 치마폭으로 감싸면서 안아주셨다. ‘울지 마라’ ‘괜찮다’ ‘불은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달려와 다 껐다’ 고 하셨다. 잠시 후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 집으로 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나에게 청심환을 먹여주셨다. 나는 소나무 밑에서 울 때 만 해도 혼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어머니께서는 나를 안아주시고 감싸주시니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느꼈다.
세월이 지나 나는 초등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고 학교 인근에서 하숙을 했다. 일주일 근무를 마치고 토요일에는 다른 친구들은 연인을 만나기 위해 바빴지만 나는 진천 고향 집으로 빨리 가서 어머니를 뵙고 싶었다.
왜 그리도 시외버스가 안 오는지? 참 답답했다. 한 시간 후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진천 집에 도착하니 저녁나절이 되었다. 제일 먼저 어머니가 반겨주셨다. 나는 어머니 품에 안긴다. “우리 막내아들 왔네”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때론 엄마 볼에 얼굴도 대본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천륜인가 보다.
저녁밥은 귀한 쌀을 조금 넣어 지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 세 식구가 저녁을 먹는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잠을 자는 시간이다. 등잔불을 끈다. 나무 장작으로 미리 군불로 때어 방은 훈훈하고 따듯하다. 나는 이때 꼭 어김없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무시는 가운데로 파고 들어간다.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어서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속으로 ‘우리 막내아들은 참으로 철부지다’라고 생각하셨을 거다. 지금 시대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다 큰 아들이 어머니 품에 안겨 잠을 자다니 ...
몇년 후 나는 중매로 늦게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니 주거문화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조금씩 변화가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나이 40대에 접어들었을 때 노령기에 접어든 어머니께서는 건강이 점점 쇠약해지시더니 끝내 돌아가셨다. 나에게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슬품 이었다. 내가 결혼 후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싶었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번은 어머니께서 몸살 감기로 편찮으실 때 자전거 뒷 안장에 어머니를 모시고 진천읍내 병원에 가서 흉부 X선 촬영과 주사, 그리고 약을 타온 것이 효의 전부다. 참으로 막내아들로서 어머니 살아생전에 효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 한이 맺힌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하고 외쳐도 본다. 어머니 장례를 모시는 날은 어머니의 관(棺)을 붙들고 놓질 않아 1시간 뒤에야 겨우 하관을 했다.
세월이 흘러 노년기에 접어든 나는 가끔 고향에 갈 때는 가족과 함께 간다. 어머니 묘소를 찾아 자녀들과 함께 풀도 뽑아주고 잔디도 정성껏 보살펴 준다.  준비해간 막걸리를 잔에 부어놓고 절을 하며 잠시 어머니 생각에 젖어본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살아생전 어머니의 효에 대한 이야기도 꼭 들려준다. 
어머니(어머니 故 이진순 여사)께서 돌아 가신지가 30여 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진천 고향의 어머니 묘소 앞에 국민가수 나훈아 씨가 부른 『모정의 세월』노래를 흰색의 국화꽃과 함께 살며시 드리고 싶다.


주요기사